
배구가 도입된 이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의 보급에 있었던 만큼 1925년 이후부터 강습회나 운동장려를 위한 운동부 신설이 속속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각종 배구경기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1925년 4월 신학기부터는 태화여자관에서 운동부를 신설하고 부원을 모집하여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농구와 배구를 일반여학교 학생과 교원들에게 당시 Y.M.C.A 체육교사가 담당지도하였다. 이는 일반여자 운동계의 배구보급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6년 8월 25일부터 4일간 겊여서는 조선신무사 주최로 일본배구계의 권위인「나라」「고조」중학교의 「미끼류우료」씨를 초청하여 배구경기에 대한 강습회가 열렸다. 이어 1927년 3월16일부터 4일간 일본인의 경성기독청년횡년회에서도 배구, 농구의 권위자인 일본 Y.M.C.A체육부간사이며 극동 「올림픽」대회 위원인 브라운씨를 초청하여 농·배구 강습회를 개최하여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배구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기술향상과 보급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일시적인 배구시합을 넘어 최초의 공식적인 배구대회가 1925년 10월4일에 개최되었는데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조선 신문사 주최의 제1회 전조선 배구 농구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로 1928년 열린 전조선중등학교 배구선수권대회는 일본인 손에 의하여 열린 다른 대회와 달리 최초로 우리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사였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배구는 경기의 내용면에서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공식적인 여러 대회들이 열림으로써 본격적인 배구 경기가 치뤄지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에 활약했던 선수들은 모두 해방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배구사에 길이 빛날 선각자들로서 배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선수들 중에 철도국의 박계조와 안종호는 우리 배구사에 있어 신화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계조의 배구에 대한 열정을 지금까지도 개최되어지는 박계조배로 이어오고 있으며, 같은 시대의 안종호는 우리 나라의 처음인 한국인 심판이로서, 배구인들에게 많은 모범을 보여왔다.
이들을 바탕으로 점점 더해지는 배구열기에 힘입어 각종 대회에 배구팀이 참가하게 되었는 바,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와 같은것이나 다만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서 주회한 일본인 위주의 체육생상인 조선신궁경기대회가 1925년 처음 열리었고 이대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의한 또 다른 종합경기로 명치신궁경기대회가 1924년부터 개최되었다. 또한 체육을 애국의 길로 강조되던 이 당시에 여자 체육진흥을 위해 육상만으로 시작했던 조선여자 올림픽대회에 배구를 신설하여 1924년 제1회 대회를 시작하였고, 여성체육진흥과 더불어 지방체육행사도 활성화를 위해 1929년부터는 관서종합경기대회 등도 개최하여 배구는 나날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