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조국광복은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큰 활력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여파는 체육계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재경체육인들은 중앙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현 대한 체육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체육회를 발족하면서 조선체육의 재건에 혼신의 힘을 쏟기에 이르렀다.
뿐만아니라 국내 각종 경기단체들도 나름대로 조직을 완료하거나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대략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체육회를 위시하여 조선 빙상경기협회, 조선육상경기연맹, 조선체조연맹, 조선송구면맹, 조선 아마츄어권투연맹, 조선배구협회등 30여 개에 달했다. 특히나 육상, 농구, 축구, 권투와 같은 종목들이 일제하에서도 비교적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반면 별반 인기도 없었고 대부분 일본인의 독점과 횡포에 시달려온 배구는 그 어떤 온동보다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함과 동시에 우리 손으로 이끌고 나갈 협회 결성에 남다른 열정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해방전에는 몇개에 불과했던 배구팀들이 해방과 함께 일약 인기종목으로 급변하면서 거의 모든 학교에 배구부가 신설되게 된다. 이때 생겨난 배구부팀들을 대략 살펴보면 여자고등부의 경우 경기, 이화, 숙명, 진명, 덕성, 풍문, 중앙, 배화, 숭의, 창덕, 상명, 동덕, 한양, 한성, 무학, 서울여상등이고 남고부는 경기, 경동, 선린, 용산, 중경, 인창, 대신, 철도, 배제, 명지, 한성, 덕수 숭문, 남산공전등이 있었으나, 1960년 배구가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면서 하나 둘씩 해체되었으며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학교는 중앙여고와 인창고만이 있을 뿐이다.
해방후 불어닥친 배구의 열풍은 실업팀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일본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일본인 위주의 체신팀은 자연 해체되고 철도팀만은 김종억, 김명수등이 남은 선수와 각 사업소대표들을 규합하여 팀을 새롭게 재건한다.
그러나 배구협회를 창설하고 각종 공식경기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배구의 보급과 기술이 향상되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은 배구는 물론 모든 분야의 발돋움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이라 한다면 전쟁으로 맥이 끊길 뻔 했던 배구역사가 그나마 군에 입대하 배구인들의 노력으로 군팀을 중심으로 부단히 그 활동을 유지해간 결과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고 막강한 군배구팀의 전력은 종전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우리 배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에 몸부림치게 되는데 해외로 눈을 돌려 국제경기에 참가함은 물론 그를 계기로 극동식인 9인제를 벗어나 국제식배구 6인제 도입을 준비한 때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배구가 실내경기로 창안되었음에도 시설의 미비로 자연스레 실외경기화되었으나 60년대를 넘어가고 70년대 이르러 체육관건립이 속속 진행되고 체육이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기에 이르자 배구 역시 실내경기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전초전으로 해방 후 10여년간의 격동기는 배구사에 무한한 고난과 땀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