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스포츠계는 변혁의 바람이 불어왔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온 나라안이 스포츠 열풍으로 소용돌이쳤다. 정치,사회적으로 직시된 당시, 국민들의 답답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분출구는 마치 스포츠인 것처럼 보였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 유치를 기점으로 급속히 변화된 국내의 스포츠 환경에 배구계 또한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79년 이낙선 회장이 퇴진한 이후 박경원, 이상용씨가 잠깐씩 회장직을 이어받다가 80년 10월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을 필두로 경제인이 한국배구를 이끌기 시작한데 이어 83년 8월 한일그룹의 김중원 회장이 제 24대 배구협회장으로 취임해 89년 2월 퇴임하기까지 80년대 한국배구를 주도했다. 특히 84년, 80년대 초반의 스포츠 열기와 스포츠 외부적 영향이 반영된 [백구의대제전]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한국배구를 견인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에는 김중원 회장의 취임과 더불어 배구인들의 사기진작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신설팀의 지원을 강화하고 협회 통솔의 효율성과 단합을 위해 산하 4개 단체로 나위어있던 실업, 대학, 중·고, 초등학교 연맹을 통·패합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며 점차 동절기에 적합한 실내 스포츠로 정착해가는 배구의 발전과 붐 조성을 목적으로 농구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84년 창설됨으로서 그동안 계속되온 실업연맹전이 없어지고 성인배구도 반은 프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신인 선수들은 대거 등장하고 실업배구의 판도는 많은 변화가 주어졌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미도파는 현대와 선경의 출현으로 184연승을 마지막으로 연승가도를 끝내고 이것이 청량제가 되어 불꽃튀는 경쟁을 펼쳐냄으로서 사상 유례없는 관중동원까지 부르게 되었다. 이는 여자배구가 춘추전국시 대로 들어섰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자 배구 또한 83년 현대자동차 써비스와 고려증권이 팀을 창단하면서 6개팀으로 증가, 활성화를 띠기 시작했고, 대학배구도 경기대와 인하대를 위주로 우수 고교 선수들을 진학시켜 탄탄한 실력과 함께 실업 배구를 능가하는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때의 대학 선수들로는 경기대의 장윤창과 정의탁, 이종경, 인하대의 문용관, 유중탁, 한장석 등이 있다. 이러한 우수한 선수들의 힘입어 81년 제2회 세계 청소년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과 브라질, 페루를 연달아 격파하며 2연패라는 구기사상 최고의 위업을 달성하였다.